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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

생탁과 함께한, 취중잡담

by 찬이 2012. 9. 12.

간만에 포스팅하는 글이 취중잡담이라니, 좀 그러네요.

 

글을 다 쓰고 나서 후회할지는 모르겠지만, 문제가 될만한 실언을 하는게 아니라면 가급적 글을 내리고 싶진 않습니다.
(제 기억엔) 어쩌면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을  제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이기도 한 만큼 후련하게 적고 싶은 심정으로 글을 적어내려갑니다.

저는 프로그래머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현 직장에서만 벌써 11년차가 되었군요.
아마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러할텐데 이쯤되면 미래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불안한 직장생활과 불어난 가족들 생각에 하루하루가 고단하죠.

저 역시도 마찬가지 입니다.
솔직히 대한민국에서 프로그래머로 살아가는 사람중에는 그나마 수입이 괜찮은 직장인 것 같습니다. 저로선 참 감사한 일이죠. 그렇지만 저 또한 새로운 출발을 하기에는 많이 늦었기 때문에 회사에 목을 멜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요즈음은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평일에는 야근을 하지 않으면 안되고 주말특근도 수시로 해야만 하는 건 여전합니다. 하지만 일정 년수안에 진급을 하지 않으면 자리를 지키기 힘든 프로세스 속에서의 야근과 주말특근은 차라리 '내가 이만큼 일을 했다'라는 티를 낼 수 있는 것이기에 오히려 마음이 편할 지경입니다. 그래야 그나마 고과를 잘 받을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이죠.

 

오늘 상반기 고과발표가 있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 것 같습니까...?
키보드 옆에 왕종근 아저씨가 광고하시는 '생탁' 병이랑 컵 하나가 딸랑 있는, 제가 앉은 우리집 책상을 보시면 금방 답은 나올 것 같네요. ㅎㅎㅎ
( 이분, 제가 뽀뽀뽀 보며 자라던 시절에 고향에서 방송하시던 분이라 참 친근합니다 ㅋ )

 

여러분들께서 생각하시는 인사고과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제가 학생시절때까지 알고 있던 인사고과는 '일 잘하는 사람에게 좋은 고과를 주고, 일을 못하는 사람에게 나쁜 고과를 줘서 당근과 채찍의 역할을 하는 인력관리제도' 같은 의미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를 아직 안짜르고 고용하고 있는 고마운 우리 회사는, 적어도 제가 몸담은 부서에서는 결코 그랬던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우리 부서에 있어서 고과란 '일 잘하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진급해야할 시즌이 된 사람에게 고과를 줘서 가급적 모두가 진급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회사의 정책은 결코 아닙니다만, 고과권을 가진 분들께서 나름 생각하셔서 그렇게 하는 것이겠지요.
우리 부서는 물론이고, 타 부서에서도 실력을 인정한, 정말 정말 대단한 우리 부서 실력 1위인 선배 조차도 상위고과를 쉽게 받지 못할 정도이니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과거이지만 한때는 이런 적도 있었습니다.
"힘들겠지만, 이번 건 맡아서 잘 처리해주면 고과 잘 주겠다. 어차피 앞으로는 실적과 성과위주로 고과를 줄거다."라고 다짐을 받고 일을 했지만, 정작 고과를 줄 때는 "그럴려고 했지만, 진급해야하는 사람들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라는 답변을 받기도 했었죠.

사실,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닙니다.
각 기능을 나누어 맡아서 진행하는 프로그래머 특성상, 특정 인력이 진급누락이 되어 소극적으로 되어버리거나 혹은 퇴사를 하게 된다면 그 공백이 엄청납니다. 그리고 한국인 특유의 '인정'이라는 것도 작용을 하는 것 같습니다. 몇년간 어려움을 함께 했던 사람을 내친다는 것이 정많은 우리나라 사람에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그래서 이 사람, 저 사람 다 챙겨서 데리고 가려니 업무성과보다는 진급대상자를 챙기는 것이 가장 효과좋은 선택일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발생되는 문제가 너무 많습니다.
진급할 차례가 되어서 고과점수를 좋게 챙겨받았다가 최종 심사에서 진급누락이 되면, 그 다음해에는 그 사람에게 고과점수가 몰리게 되고, 그로 인해서 후배사원들은 채워야할 고과점수에 공백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다가 입사동기가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진급누락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그래서 인사고과제도는 업무역량이나 성과와는 거의 무관하게 진행되고, 이로 인해서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이죠.

객관적으로도, 그리고 주변 동료들의 평가로도 정말 열심히 일을 했음에도 상위 40~45%에도 들지 못하는 후배가 있는가 하면, 회사에서 게임하고 만화보며 놀고 일은 안하지만 고과는 잘 챙겨받는 선배도 있습니다.
팀원들을 챙기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하다가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조차도 그럴 필요성을 못느끼고 느슨해지는 분위기고 되지 않을지 걱정입니다.

 

그런데, 정말 속상해서 막걸리 한병을 챙겨들고 컴퓨터 앞에 앉은 건, 제 고과 때문이 아닙니다.

 

저도 물론 고과를 좋게 받지 못했습니다만, 저야 같은 평가대상자 중에서는 후배에 속합니다. 진급대상자가 되려면 한참 남은거죠. 그래서 별 기대도 안했죠. 이런게 한해 두해 있던 일도 아니고....
문제는 제가 데리고 있는 후배들입니다. 비록 제가 관리자나 부서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꼴에 기능팀장이라고 후배사원 몇명을 데리고 함께 일을 하거든요.

올해초, 우리가 해야할 일이 아님에도 고과권을 가진 분들의 압력에 의해 몇달간 밤을 새가며 일을 진행했습니다. 물론 진급이 얼마 남지 않은 후배도 함께였구요. 다른 사람들은 우리 프로젝트만 할때, 저와 제 후배들은 우리 프로젝트는 물론 다른 팀의 프로젝트도 해야했기에 토, 일요일 할 것 없이 정신없이 일을 했습니다.
새벽 2~3시에 퇴근해서 아파트 주차장에 주차하다가 전화받고 다시 회사에 나온 적도 더러 있고, 법정 근로시간 초과문제로 상당히 곤혹스러웠던 적은 수시로 있었습니다. 법적으로는 넘기지 말아야 할 근로시간을 훨씬 넘겨야만 해결이 가능한 일들이 쌓인 것이죠.
일은 100시간만큼의 일을 주고, 시간은 70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면 당연히 식사시간 쪼개고, 화장실 두번 갈거 한번만 가고 그렇게 일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쨌거나 일은 해야하고 법정근로시간은 준수해야하니... 뭐, 더 자세한 속사정들은 회사내 이야기라 적기도 곤란하니 생략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일을 했습니다. 하루이틀이요...? 일주일...? 우린 거의 반년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올 상반기 내내 말이죠. 하지만 반년에 대한 평가가 '보통'이라는 것 외에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프로젝트의 실적 조차도 우리 부서가 아닌 타 부서 실적으로 남게 되구요.

몇달 고생후 돌아온게 있다면 "덜 열심히 해서 아쉽게 고과를 못받았으니, 다음에는 더 열심히 해라" 라는 말 뿐...
뭐, 한두번 들은 것도 아니지만 들을때 마다 어이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최상위 고과를 못받았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물론 당사자들 입장에서이긴 합니다만) 남들보다 두배는 더 일을 했는데 상위 45% 안에도 못든다니요. 정말 후배들에게 제가 뭐라 위로를 해야할지 모르겠더군요.

후배들도 신입사원을 제외하면 다 가정이 있고, 어린 자녀들도 있구요. 앞으로의 진급에 대해서도 걱정하며, 그러면서 저를 믿고 따르고 있는데, 막상 고과권자를 가진 분들께서 일을 시키면서도 정작 고과를 줄 때는 업무능력이나 성과와는 상관없이 평가를 하게 되니, .... 참 정말 힘드네요. 술 좋아하면 제 사비를 털어서 술이라도 자주 사주고 싶구만 그렇지도 않고....

 

그래서 오늘, 다들 야근하는 와중에 배째고 칼퇴근 해버리고는 막걸리 한잔 걸쳤습니다.

 

소주는 쓰고, 맥주는 배부르고 ^^;;;
그마저도 혼자 처량하게 술집에 가서 홀짝홀짝 마시고 대리운전 부르거나 혹은 어두운 밤길을 비틀거리며 오느니 그냥 집에서 마시자 싶어, 책상앞에 막걸이 한병이랑 컵 하나랑 놓고 홀짝홀짝 마시는 중입니다. 그러고보니 그 흔한 김치 안주도 없었네요. ㅎㅎㅎ

제가 고과권자가 되었을때는 나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왜곡된 현실을 타파할 힘이 제게 생겨날지...
하지만 정말 힘들고 미안하네요. 정말 정말 미안해 죽겠어요...
이런 상황에서 제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게 한심스럽고...
한다고 하더라도 저 또한 제 몸뚱아리 하나만 있는게 아니다보니 쉽지 않고...
그리고 저 또한 관리자가 되면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느껴지고...

술이 다 떨어졌군요. 쉬엄쉬엄 마셨는데도...;;;
이건 여담이지만, 고과 한단계가 높아지면 연봉이 적어도 2백만원 정도는 왔다갔다 하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연봉이 증가되면 누적되기 때문에 퇴사할때까지 남들보다 연봉이 더 높게 증가됩니다. 물론 최상위 고과인 경우에는 훨씬 많이 차이나겠죠. 게임하고 인터넷하며 놀던 사람을 진급차례라는 이유로 자신에게 올 고과점수를 양보하는 것 치곤 금전적으로만 봐도 적지 않은 손해인데, 더군다나 그걸로 인해서 자기자신이 진급누락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ㅎㅎㅎ

내일 술깨고 출근을 해서 후배들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 있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정말, 블로그에 포스팅하면서 오늘처럼 슬픈 기분이 드는 건 처음이네요.
물론 더 열악한 직장생활 혹은 취업도 하기 힘든 요즘에 호강스러운 이야기인 건 압니다. 어려운 상황인 분 많은데 이런 소리 하는거 정말 배부른 소리란 것 알고 있습니다. 그 분들께는 정말 죄송하구요... 그냥 제 심정이 이렇다고만 받아들여주세요. 아니꼽게 배부른 소리 한 건 죄송합니다. ㅠ.ㅠ

시원한 가을향기가 나는 내일 아침을 기대하며, 오늘은 좀 일찍 잠들어야겠습니다.
자꾸 눈물이 나네요. 후배한테 정말 미안해서 어떻게 해야할지를......
제가 관리자가 되면은 절대 안그래야지... 다짐을 해봅니다.
열심히 일한 사람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는 사회가 되어야지 않겠어요...? ㅠ.ㅠ

미안합니다, 우리 후배님들... (저는 존댓말 쓰는 관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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